설교말씀

2020-12-13 "하나님의 마음으로"-(갈2:6~10)
2021-03-11 15:22:26 지음교회 조회 1729

201213-주일낮예배(갈라디아서 강해5)

 

하나님의 마음으로

◈ 갈 2:6~10 ◈

 

여러분은 유명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또는 정치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유명한 자, 유력한 자 등을 만나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심지어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은 매년 자신과 함께 단 한 번 점심 식사하는 것을 경매하는데, 작년에는 약 54억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유력한 자와의 교제는 그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우상과 한 번 악수라도 하면 평생 손 안 씻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여 그곳의 유력한 자들을 만나 교제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만남의 결과가 복음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의 직분자들이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섬겨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유력한 자들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력한 자들과 만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2장에서 유력한 자라는 표현을 2절과 6절에서 3번이나 사용하고 있고, 9절에서는 ‘기둥같이 여기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럼 이 유력하다는 표현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표현은 유명하다라는 의미도 있을 뿐 아니라 중요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며,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굳이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라고 하지 않고, “유력한 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표현은 그들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미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반대로 ‘소위 유력하다고 하는 자’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이들의 이름을 등에 업고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유대주의자들을 비아냥하기 위한 의도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력한 지위에 있는 자들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럼 그 유력한 자들은 누구일까요? 9절에 보면 유력한 자와 비슷한 표현으로 “기둥 같이 여기는”이라는 표현으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가 아닙니다. 제자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행전 12:1~2절에서 헤롯왕에게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1:19절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밝혔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보다 먼저 언급된 것은 당시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를 언급하는데, 바울은 굳이 베드로라고 하지 않고 게바라고 언급합니다. 바울은 실제로 바울서신 중에 베드로라고는 7절과 8절에 딱 2번만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다 게바라고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게바와 베드로는 모두 반석이라는 의미이지만, 베드로라는 헬라식 이름보다는 게바라는 아람어 이름을 사용하므로 그가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임을 은연중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유력한 자들이 바울과 바나나 일행을 만나서 다른 의무를 더하여 요구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유력한 자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마디하면 그것이 여론이 되고, 그 여론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에게 어떠한 의무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도의 할례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바울과 바나바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 등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의무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그들이 복음 외에 다른 의무를 요구했다면 갈라디아 교회에 활동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되지만,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기에 유대주의자들은 거짓 선생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유명한 자가 되신 지음가족 여러분! 세상처럼 교회에도 유력한 사람,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력한 자라면 그만큼 언행에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교회의 이미지와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항상 말씀에 근거하여 말하고 행동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기 힘든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지 맙시다.

 

2. 하나님의 사도들이

유력한 자들은 자신들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복음을 바울이 전하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등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번엔 게바라 하지 않고, 베드로라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가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이 환상 중에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는 음성을 듣고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를 찾아가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헬라식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무할례자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이는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제는 무할례자가 아니라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사역의 전문화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일 수 있으나 바울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아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할례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셔서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를 무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유력한 자들에게 자신들이 무할례자들에게 전한 복음에 대하여 설명했고, 그것이 그들이 할례자에게 전한 복음과 다르지 않음을 확증 받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역사하셔서 복음이 무할례자 곧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집중하는 것에는 조금 아쉽지만, 하나님께서 그 빈자리를 자신들을 택하셔서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사역의 방향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이라도 복음이 필요한 자들이며, 복음을 듣고 믿으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결국 할례자에게 전한 복음이나 무할례자에게 전한 복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을 대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들과 바울과 바나바의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대표들이 나눈 친교의 악수입니다. “친교의 악수를 하다”라는 말을 직역하면 “친교의 오른손을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동의한다는 의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사역의 영역은 할례자와 무할례자인 이방인으로 나뉘지만 서로 협력하여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들이 친교의 악수를 한 것은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의회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것입니다. 이는 유대주의 선생들의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나 안디옥 교회, 유대인들의 교회나 이방인의 교회 등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한 몸을 이룬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친교의 악수를 나누며 한 몸을 이루고 계신 지음가족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교파가 왜 이렇게 많냐?”라고 하면서 서로 경쟁 상대인 양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파는 다르지만 결코 경쟁상대가 아니라 친교의 악수를 나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나 다른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다를 수 없습니다. 다만 사역자들의 사역 방향 등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서로 협력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럼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할까요? 먼저 바울은 6절에서 유력한 자들을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라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즉 유력한 자가 예수님의 동생이든지, 수제자였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유력한 자들이 볼품없는 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외모 등 외부적인 것으로 취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기에 유력한 자들이 누구라도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상관없이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라는 말은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한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라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에 할례자나 이방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차별하지 않으시되 오직 그들에게 전파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례자에게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나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은 그 사람이 어떤 민족이냐, 어떤 조건을 갖추었느냐, 어떤 지위에 있느냐, 무엇을 가졌느냐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제대로 복음이 전파되느냐, 그리고 그 복음을 믿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관심인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파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함께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십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들은 바울과 바나바 곧 안디옥 교회 대표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기근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부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조해 달라는 요청일 수 있지만, 사실 가난한 자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초대교회 당시의 가난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향한 구제가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7집사를 세웠습니다. 당시 믿는 사람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고(행2:44~45),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행4:34). 이는 넉넉한 자들이 부족한 자들을 보충하여 서로 균등케 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고후8:14). 결국 초대교회에서부터 구제 사역은 복음전파와 함께 중요한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사람의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지음가족 여러분! 여러분이 복음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외모나 조건은 보잘 것 없지만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복음을 받고 구원을 얻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입은 교회는 복음 전파와 구제 사역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교회를 두고 교회 치장하고 장식하는 것에 무관심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복음 전파와 구제에 있습니다. 재정의 30% 가까이를 그렇게 사용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는 유력한 자도 있고, 유력하지 않은 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력하든지 유력하지 않던지 간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비록 교회마다 대상자나 사역지는 다르지만 전하는 복음은 동일합니다. 서로 한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외모나 조건으로 판단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서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원하시는 분들은 다함께 찬송가 595 장으로 주신 말씀에 응답찬송을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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